정말로 지금, 북한과의 전쟁을 심각히 걱정해야 하는 걸까요? 북한이 아우성치는 게 한두 해도 아니고 괜한 걱정이지 싶겠지만, 지난 11일 미국의 북한 전문 매체에 글을 실은 두 북한 전문가의 생각은 다릅니다.
“1950년 6월 초 이래로 한반도의 상황이 지금만큼이나 위험했던 적이 없다. 과장처럼 들릴지 모르나, 우리는 김정은이 1950년 그의 조부[김일성]가 그랬듯, 전쟁을 감행할 전략적 결정을 내렸다고 생각한다.
The situation on the Korean Peninsula is more dangerous than it has been at any time since early June 1950. That may sound overly dramatic, but we believe that, like his grandfather in 1950, Kim Jong Un has made a strategic decision to go to war.”
“Is Kim Jong Un Preparing for War?”(2024. 1. 11), <38 North>
그들이 보건대, 지금의 북한을 그 이전의 북한과 같이 생각해선 안 됩니다. 2020년대 북한의 행보는 여태껏 한국, 일본, 미국이 경계해 왔고 또 익숙해진 수준을 한참 넘어섰다는 건데요. 북한이 군사적인 모험을 결단할지도 모른다는 경고. 그 단서로 여러 정황을 들었으나, 우리의 살결에 와닿는 대목은 북한의 대남 정책이 급변했다는 지적입니다.
30여 년 만의 변화 “적대적인 두 국가”라는 관계 규정
북한이 도발을 감행하거나 험악한 발언을 내쏟는 건 예사로운 일입니다. 우리로선 수십 년을 경험하고 익숙해진 까닭에 북한이 예전이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사납다고 생각하기 쉬운데요. 하지만, 요즈음의 북한은 정말로 달라졌습니다. 그저 말을 과격하게 하는 정도가 아니라 대한민국을 마주하는 근본적인 입장을 180도 뒤바꿨습니다.
📄 30년간의 합의
1991년 <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남북기본합의서)에 조인(1992년 발효)한 이래 남북한이 지켜온 최소한의 합의 사항이 있습니다. 남북은 한반도의 평화 통일을 지향하며, 그렇기에 남북의 관계는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가 아니라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되는 특수관계”라는 규정입니다.
이런 약속을 했다고 남북이 돌연 군사적 대립을 멈추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수사적인 차원에서만큼은 남북이 동포이며, 언젠가는 대화를 통해 통일에 이르겠다는 원칙을 부인하지 않았는데요. 이후 30여 년의 남북 관계는 남북기본합의서라는 주춧돌 위에 세워졌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 ‘남조선’ 괴뢰
남북이 별개의 국가가 아니라는 원칙을 따라, 북한은 공식 문서가 아니면 대한민국을 ‘대한민국’이라 부르지 않았습니다. 대체로 ‘남조선’ 내지는 ‘남측’이라는 호칭을 사용했습니다. 종종 ‘남조선 괴뢰’라고 언성을 높일지언정 ‘대한민국’이라는 명칭은 한사코 피해 왔는데요.
🇰🇷 김여정의 “대한민국”
변화의 조짐이 보인 건 작년 7월입니다. 김여정 조선노동당 부부장이 여느 때처럼 남한과 미국을 비난하는 담화를 냈는데요. 남조선이라는 호칭 대신 대한민국이라는 국호가 네 번이나 사용됐습니다. 갑자기 바뀐 호칭에 국내외의 관심이 모였으나, 그때까지만 해도 북한이 수십 년간 고수한 원칙을 깼다고 확신하진 못했습니다.
🎙️ 김정은의 공식화
북한의 입장 변화가 공식적으로 확인된 건 작년 12월. 노동당 전원회의(제8기 제9차)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근본적으로 대남 투쟁원칙과 방향을 전환해야 한다”라고 밝힌 때입니다.
김정은은 “북남 관계는 더 이상 동족관계, 동질관계가 아닌 적대적인 두 국가관계, 전쟁 중에 있는 두 교전국 관계로 완전히 고착됐다”라고 발언했습니다. 남북은 국가 대 국가의 관계로 규정됐고, 평화 통일을 함께 지향한다는 원칙도 폐기됐습니다.
그간 북한의 통일 정책이 썩 의미 있었다고는 말하지 못하겠습니다. 하지만 북한도 원칙적으로는 통일을 염두에 두고 남북 대화, 교류, 접촉을 시도해 왔는데요. 이날을 기점으로 북한은 남한을 화해와 통일의 파트너로 인정하지 않겠다고 공식 선언한 셈입니다.
📝 개헌으로 쐐기까지
북한은 내친김에 헌법까지 바꾸기로 작정했습니다. 김정은은 지난 15일 열린 최고인민회의(제14기 제10차)에서 새로운 대남 전략을 헌법에 반영하라고 지시했는데요. 북한은 헌법에서 ‘통일’, ‘민족’과 같은 표현을 지우고 대한민국을 ‘제1의 적대국’ ‘불변의 주적’으로 규정할 방침입니다.
배경: 1991년의 남북기본합의서와 탈냉전
통일을 포기하고 남한을 대한민국이라 부르는 건 1991년의 남북기본합의서를 폐기한 것과 같습니다. 이때 ‘1991년’이라는 시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1991년은 소련이 붕괴한 해이자 이미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 여럿이 무너진 해. 한마디로 말하면 냉전이 끝난 해, 이른바 탈냉전의 원년(元年)입니다. 남북기본합의서는 북한이 탈냉전의 국제 정세에 대응하기 위해 채택한 하나의 노선이었습니다. 그러니 남북기본합의서의 노선을 폐기한 결단 역시 새로운 냉전이 엄습하는 국제 정세와 무관할 수 없습니다.
🌏 탈냉전 앞의 북한
냉전의 종식은 북한에 커다란 위협이었습니다. 오랜 동맹인 소련이 무너지고 중화인민공화국이 서구권과 가까워지는 상황. 북한으로선 국제적으로 비빌 언덕이 사라지면서 당장 체제 유지를 걱정해야 할 판국이었습니다. 외교적으로는 고립되고 경제적으로는 처참한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 대화가 강요된 북한
미국, 남한과 대결하려는 자세는 더는 유지할 수 없었습니다. 북한 체제에 남은 유일한 선택지는 미국과 테이블에 앉아 관계를 정상화하는 길, 그리고 남한과는 평화적 공존을 모색하는 길이었습니다. 남한 주도의 흡수 통일을 방지하고 미국에 말을 붙이기 위해서라도 북한은 한반도의 긴장을 느슨하게 풀어야 했습니다. 그 결과물이 바로 1991년의 남북기본합의서였습니다.
😨 하노이의 단념
이후 북한은 어떻게든 미국 주도의 국제 질서에 편입하는 걸 목표로 삼았습니다. 미국과의 관계 정상화는 북한에 남은 유일한 선택지였고, 동시에 북한이 이룰 수 있으리라 희망을 품어 온 길이었는데요. 갈수록 희미해지는 희망이 결정적으로 박살 난 건 2019년의 하노이 북미정상회담에서였습니다. 회담에서 ‘노딜(no deal)’로 수확 없이 걸음을 돌려야 했던 김정은은 미국과 관계를 개선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단념했습니다.
⚔️️ 신냉전의 북한
동시에 북한은 미국과 관계를 개선하지 않아도 될 만한 새로운 국제 정세, 신냉전을 마주했습니다. 북한으로선 마치 1991년 이전처럼 숨구멍이 트이는 상황입니다. 굳이 미국의 비위를 맞추지 않아도 미국 반대편의 중국과 러시아에서 활로를 찾을 수 있습니다. 이미 북한과 중국, 러시아의 관계가 상당히 긴밀해졌다는 보고가 나옵니다.
✊ 달라진 북한
상황이 바뀌자 북한의 태도도 변화했습니다. 무엇보다 북한의 군사적 행위의 목표부터가 달라졌는데요.
과거 북한의 핵 개발과 미사일 도발은 미국의 관심을 끌기 위한 투정이었습니다. 자신이 제법 위협적이라는 걸 알려서 미국을 협상 테이블로 끌어내려는 의도였기 때문에, 판 자체를 엎을 만큼 과격하게 굴지는 않았습니다. 북한은 남한과 대화를 이어가면서 한반도의 긴장을 일정 수준 이하로 관리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다릅니다. 북한은 미국과 남한이 아니라 중국과 러시아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한반도에서 긴장을 끌어올릴수록 중국과 러시아가 북한에 대가로 내어줄 게 많은 형국입니다. 북한의 군사 행위는 대미 협상 카드가 아니라 그 자체가 해결책이 돼버린 겁니다.
💔 남북 관계의 단절
북한이 남북기본합의서를 깬 건 위와 같이 커다란 정세 변화가 대남 정책에 반영된 결과입니다. 북한은 더는 남한과 대화하며 평화 무드를 조성하고 긴장을 관리할 필요를 느끼지 못합니다. 북한은 이미 2020년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폭파했고, 2021년부터 통일과 민족이라는 표현을 지우기 시작했습니다. 그 흐름이 작년 말과 올해 초의 ‘한반도 두 국가’의 대남 정책을 공식화하는 데까지 이어지는 셈입니다.
전망: 북한은 정말 전쟁을 벌일까?
전반적인 정세에 비춰 볼 때, 향후 북한의 공세적인 시위와 도발이 이어지리라는 전망은 설득력이 있습니다. 하지만 북한이 진정으로 전쟁을 감행할 기회를 엿보고 있는지, 그래서 한국과 미국이 설령 무리를 해서라도 선제적으로 대처해야 하는지의 질문까지 나아갔을 땐 전문가들의 시각이 분분하게 갈립니다.
🚀 과격해진 도발
최근 북한 도발이 한층 과격해졌다는 건 분명한 사실입니다. 2020년대 들어 군사 도발의 횟수가 확연하게 증가했고, 한미 연합 훈련에 대응하는 수위도 전례 없는 수준으로 격렬합니다. 무엇보다 핵무기와 탄도미사일 개발에 집착적으로 열중하고, 대외적으로도 핵 무력을 과시하는데요. 2010년대 후반 북한이 일시적으로나마 핵무기 개발을 중단했던 것과는 대비되는 모습입니다.
💥 전쟁을 논하는 북한
행동이 아닌 말을 보더라도, 북한은 최근 들어 부쩍 한반도의 전쟁 가능성을 노골적으로 운운하고 있습니다. 2022년엔 핵무기 사용을 법제화하면서 한국을 겨냥해 선제적으로 핵 공격에 나설 가능성을 열어뒀는데요. 이달의 최고인민회의에선 전쟁 발발 시 대한민국을 무력 점령한다는 원칙을 헌법에 반영하리라고 계획하기도 했습니다.
🤔 정말 전쟁?
하지만 언행이 보다 과격해졌다고 해서 필시 북한이 전쟁을 결심한 건 아닐 수 있습니다. 미국의 북한 전문 매체 <38 North>에 북한이 전쟁을 결심했다는 경고가 담긴 글이 기고된 후, 또 다른 전문가가 그에 반박하는 글을 투고했는데요. 요점은 북한의 언사는 2010년대에도 충분히 과격했으며 다만 최근엔 그 빈도가 늘었을 뿐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근본적으로 평양[북한]은 바뀌지 않았다. 다만 내가 [북한이 전쟁을 결단했다고 경고한] 저자들에 동의할 수 있는 바는, 최근 북한의 폭력적인 언사가 늘었다는 사실뿐이다.
So basically, there is nothing new in Pyongyang, but—and here, I agree with the authors—recently, there has been an increase in this kind of violent language.”
“A Fundamental Shift or More of the Same? A Rebuttal”(2024.1.17), <38 North>
🗳️ 목표는 선거?
반박문을 기고한 전문가에 따르자면, 북한은 정말 전쟁을 내기 위해 과격한 행보를 걷는 게 아닐 수 있습니다. 오히려 북한은 여전히 미국과의 협상에 미련을 남겼을지도 모르는데요. 한반도의 긴장 국면을 조성하고, 그렇게 올해 연말의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 도널드 J. 트럼프를 당선시키고, 군사 행위로 올려친 몸값을 토대로 협상에 나서는 것. 결국은 미국과의 담판으로 경제 제재를 풀고 주한미군을 철수시키는 게 북한의 진정한 목표라는 분석입니다.
🤔 여러 시나리오
이 밖에도 북한의 저의에 대해서는 여러 가능성이 제기됩니다. 일각에서는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대내적으로 정치적 입지를 다지고자 했다는 의도로 최근의 행보를 설명하기도 합니다. 점차 체제 외부의 정보를 흡수하는 북한 주민의 사상을 다잡으려고 남한을 적대시한다는 해석도 있습니다. 해석은 다양하나, 어떤 해석이 옳다고 확신할 수 없으니 여러 가능성을 열어두고 대처에 나설 수밖에 없습니다.
전쟁이 터지리라고 예언할 수도, 그럴 일은 절대 없으리라고 단언할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이견의 여지 없이 확실한 사실 하나가 있습니다. 북한의 진의가 전쟁에 있든 아니든 간에, 지금의 군사적 긴장 자체가 심각하게 위험하다는 건데요. 이렇게 쌍방이 한껏 예민하게 달아오른 국면에선 티끌 같은 실수와 경거망동도 파국을 부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한미동맹이 북한을 억지하리라는 막연한 기대만으로 넘겨볼 수 없는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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