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 국가에서 정권의 지지율을 결정하는 요인은 다양합니다. 유권자마다 초점을 두는 이슈가 다르기 때문인데요. 누구는 정권의 외교 정책을 중시하는가 하면, 또 다른 누구는 인사 정책의 청렴도를 눈여겨봅니다. 하지만 그 다양한 요인 중에서도 가장 두드러지는 이슈를 꼽으라면 단연코 경제를 이야기할 겁니다. 당장 형편이 팍팍한지 윤택한지가 유권자의 마음에 큰 영향을 미치기 마련입니다.
일본도 다르지 않습니다. 최근 자유민주당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내각의 지지율이 급격히 떨어지고 있는데요. 여러 악재가 내각의 지지율을 끌어내렸지만, 무엇보다도 경제 이슈의 영향력이 지대합니다. 한마디로 말해, 일본 내각의 위기 속에서 일본 경제의 위기가 엿보입니다.
위기: 내각과 집권당 지지율 모두 최저
기시다 후미오는 2021년 9월 자민당 총재로 선출되고 10월 내각총리대신으로 취임했습니다. 위 그래프를 보면, 한눈에 기시다 총리가 위태로운 상황에 부닥쳤음을 알아볼 수 있습니다. 기시다 위기론이 솔솔 흘러나왔던 작년 말보다도 지지 기반이 한참 무너진 상태입니다.
📉 최악의 지지율
기시다 내각 지지율이 몇 달째 20%대입니다. 대다수 여론조사에서 20% 후반대의 지지율이 나오는데요. 한 조사에선 지지율 21%라는 충격적인 결과가 발표되기도 했습니다. 집권당인 자유민주당(자민당)은 같은 조사에서 19%의 지지를 받았습니다. 내각 지지율과 자민당 지지율 모두 2012년 이후 최저치입니다.
🗳️ 10월의 패배
최근 치러진 선거의 기류도 심상치 않습니다. 지난 10월 있었던 중의원(하원) 한 석과 참의원(상원) 한 석의 보궐 선거 이야기입니다. 두 선거구 모두 자민당이 지난 선거에서 야당을 큰 차이로 제친 지역이었지만, 이번엔 한 곳에서 의석을 뺏겼습니다. 의석을 유지한 선거구에서도 야당과의 득표 차가 상당히 줄었습니다. 유권자가 기시다 내각과 자민당에서 등을 돌리고 있다는 신호가 나타난 셈입니다.
원인: 일본 경제에 드리운 먹구름
기시다 내각의 인기가 이렇게까지 떨어진 데는 여러 이유가 있습니다. 아무래도 가장 부담스러운 문제는 경제입니다. 오랜 침체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에도 일본 경제가 최근 다시 어려움에 빠졌기 때문입니다.
👎 기시다 내각의 악재
마이넘버 카드 오류
일본 정부는 행정의 디지털 전환을 위해 새로운 주민등록증 '마이넘버 카드'를 도입했습니다. 연이어 대형 오류가 발생하면서 내각의 지지율이 크게 하락했습니다.
인사 실패
기시다 내각은 저조한 지지율을 만회하기 위해 지난 9월 대규모 개각을 시도했습니다만, 처참한 인사 실패에 부닥쳤습니다. 차관급 인사 세 명이 불륜, 선거법 위반, 세금 미납으로 낙마했습니다.
😱 잃어버린 30년
일본은 버블경제 이후 오랫동안 디플레이션에 시달렸습니다. 물가가 떨어지니 기업 실적이 위축하고, 그로 인해 고용과 임금이 쪼그라들면 소비가 줄어 다시 물가가 떨어지는 악순환이 계속됐습니다. 일본 경제 정책의 최우선 목표는 디플레이션 탈출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 반짝인 희망
일본 정부는 돈을 찍어내는 유동성 공급 정책, 이른바 '아베노믹스' 정책을 끌고 왔습니다. 목표는 물가 상승률을 2%, 경제 성장률을 3%까지 끌어올리는 겁니다. 그렇게 10년 넘도록 이어진 아베노믹스가 최근 열매를 맺었습니다. GDP가 지난 1분기 0.9% 성장하는 데 이어 2분기 1.5% 증가했거든요.
⚠️️ 돌아온 위기
하지만 장밋빛 희망은 길게 가지 못했습니다. 지난 3분기 GDP 성장률이 다시 내림세로 접어들었습니다. 그것도 예측한 것보다 더 급격하게 -2.1%까지 떨어졌죠. 수출은 증가세가 꺾였고 내수 소비와 투자는 선순환을 돌릴 힘이 없었습니다. 2024년과 2025에도 경제 성장률은 점점 둔화하리라는 예측이 나옵니다.
💴 물가와 임금
일본 국민은 경제가 시원치 않다는 걸 몸으로 느낍니다. 정부는 물가와 임금, 소비를 한 번에 끌어올려서 선순환을 굴리겠다지만, 국민의 시선에서 물가는 오르는데 임금은 오르지 않았거든요. 물가를 반영한 실질 임금은 1년 넘게 내림세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지지율이 떨어지지 않기가 힘든 상황이죠.
기시다의 카드: 물가 대책과 감세 조치
기시다 총리로선 가만히 있을 수가 없습니다. 일본 정부는 '물가 상승 → 기업 실적 증가 → 임금 상승과 소비 증가 → 물가 상승'의 선순환을 기대하고 있는데요. 소비자가 고물가로 지갑을 닫으면 선순환의 고리가 끊어지는 셈입니다. 정부의 경제 부활 계획은 말짱 도루묵이 되는 거죠. 기시다 총리는 나름 특단의 조처를 내렸습니다.
🎙️ 기시다의 승부수
지난 11월 2일 기시다 내각은 강수를 던졌습니다. 일명 ‘디플레이션 완전 탈피를 위한 종합 경제 대책'. 가계 소득을 보전해서 고물가 속에서 소비를 촉진해 보겠다는 의도인데요. 총규모가 한화 300조 원을 훌쩍 넘는 대규모 경기 부양책입니다.
감세
정부는 2024년 주민세를 1인당 27만 원, 소득세를 1인당 9만 원가량 깎기로 했습니다.
저소득 가구 지원
주민세를 내지 않는 저소득 가구에도 혜택을 제시했습니다. 가구당 약 62만 원의 지원금을 지급하기로 했죠.
물가 대책
가구의 전기료, 가스료 부담을 줄이기 위해 올 초부터 운영한 보조금도 내년 봄까지 연장하기로 했습니다.
🗣️ 다급한 미봉책
가계 가처분 소득을 보전해서 경제를 활성화하겠다는 계획. 말로는 그럴듯하지만, 여러모로 의심의 눈초리를 받습니다. 기시다 총리는 그간 증세를 거듭 이야기했지, 감세를 진지하게 정치적 의제로 던진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정권의 생존이 위급해지자 임시방편으로 허술한 정책을 던진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는 배경입니다.
증세 🆚 감세
무엇보다 기시다의 국정 기조상 증세를 피할 수 없다는 게 문제입니다. 작년 기시다 내각은 방위비를 대폭 증액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당장 올해부터 해당 예산을 확보해야 합니다. 증세가 불가피한 정책을 추진하고서는 정반대로 감세를 단행하니 엇박자라는 비판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기시다 정부는 증세는 필요하지만, 경기가 살아날 때까지는 미루겠다고 설명했는데요.
🤷♀️ 기대는 어려워
일본의 경기 부양책은 이번이 처음이 아닙니다. 전문가들은 이번 대책도 지난 부양책과 마찬가지로 큰 효과를 보기는 힘들다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소비자에게 몇 푼을 쥐여 준다고 갑자기 소비가 살아나기는 어렵다는 뜻입니다. 더구나 일본의 국가 부채는 GDP의 250% 이상으로 쌓인 상태입니다. 경기 부양책이 국가 재정에 지우는 부담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 싸늘한 반응
유권자의 시선도 그리 밝지 않습니다. 대책 발표 이후에도 기시다 내각은 떨어질 대로 떨어진 지지율을 반전시키지 못했습니다. 「아사히 신문」의 여론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28%만 기시다의 경제 대책을 높이 평가했습니다. 응답자의 68%, 즉 2/3는 높이 평가할 수 없다고 답했습니다.
전망: 기시다 총리는 살아남을 수 있을까?
지금의 상황이 이어지면 기시다 정권의 생존부터가 어렵습니다. 기시다 총리는 내년 자민당 총재 선거를 앞두고 있습니다. 총재 선거에서 재집권하고 총리직을 유지할 가능성이 점점 낮아지고 있습니다.
🎲 두 가지 법칙
일본 정치에서는 정권의 생존 가능성을 점칠 때 두 가지 법칙을 고려하는데요. 법칙에 따르면 기시다 내각은 이미 임종에 다다른 상황입니다.
아오키의 법칙
내각 지지율과 집권당 지지율의 합이 50%를 넘지 못하면 정권을 끌고 가기가 어렵다고 봅니다. 현재 기시다 내각 지지율과 자민당 지지율의 합은 50% 내외로 한계선 근처에서 서성이고 있습니다.
정당 지지층의 법칙
집권당 지지자 중 내각을 지지하는 비율은 60%가 마지노선으로 여겨집니다. 집권당의 지도부가 내각을 꾸리는 만큼 집권당 지지자는 내각도 지지할 가능성이 큰데요. 그 비율이 60%도 되지 못하는 건 그만큼 정국이 위중하다는 뜻입니다. 현재 기시다의 지지율이 바로 그 마지노선에 근접했습니다.
📆 위급한 내년
일본은 원내 다수당, 즉 집권당의 총재가 총리로 올라서 내각을 꾸립니다. 기시다의 총재 임기 3년은 내년이면 끝납니다. 기시다가 재집권하기 위해선 중의원을 해산해 선거를 치르고 권력 기반을 다지는 게 유리한데요. 현재 지지율이 워낙 저조한 탓에 기시다 총리는 중의원 연내 해산을 단념했다고 알려졌습니다.
👥 당내 분위기
기시다 총리는 지지율이 낮아도 자민당만 꽉 잡으면 재집권에 성공할 수 있습니다. 특히 자민당의 굵직한 파벌을 포섭하는 게 중요한데요. 아직까진 주요 파벌이 기시다 총리를 지지하는 분위기입니다. 하지만 보궐 선거의 낙제점으로 당내 위기감이 점점 커지는 상황. 당내 지지가 언제까지 이어질지는 미지수입니다.
👊 시동 거는 경쟁자
기시다 총리로선 경쟁자의 행보도 위협적일 겁니다. 기시다 내각의 각료인 다카이치 사나에 경제 안보 담당상은 내년 총재 선거를 노리고 지지세 규합을 시작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꽤 알려진 고이즈미 신지로 전 환경상도 총재에 도전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세계 각국의 정권이 민생 챙기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글로벌 경제가 위축되고 나아가 구조가 재편되는 지금, 그 변화에 적절히 대응하는지에 정권의 생존이 달렸기 때문인데요. 일본의 내년 자민당 총재 선거도 흥미롭지만, 당장 우리나라부터 내년 4월의 총선을 앞두고 있습니다. 한국 경제가 점점 침침해지는 상황에서 어쩌면 유권자가 내릴 선택이 한국 경제의 미래를 결정할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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