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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LETTER/국제 LETTER

한국과 러시아, 두 나라에 무슨 일이 있었을까

by 칲 조 2024. 2.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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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컷뉴스

 

동북아시아에서 점점 뚜렷해지는 신냉전의 구도가 우려스러운 요즘입니다. 한편에서는 한국, 미국, 일본이 손을 맞잡고, 다른 한편에서는 북한, 중국, 러시아가 가까워지는 형국인데요. 신냉전이 정말 현실로 다가올수록 한반도를 둘러싼 정세는 점점 거칠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 명백한 증거를 한·러 관계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남북 관계나 한·중 관계에 비해선 그리 주목받지 않았지만, 역시나 예외 없이 신냉전의 여파를 정면에서 맞았는데요. 오늘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착실히 악화하고 있는 한국과 러시아의 사이를 살펴보겠습니다.



최근: 러시아의 옐로카드

러시아 외교부 대변인 마리야 자하로바(Maria Zakharova)


무릇 외교 공간에서는 언행을 극도로 조심하기 마련입니다. 상대국에 언짢음을 표할 때도 어조를 절제하고 표현을 정돈하는 게 일반적인데요. 요즈음의 러시아는 그렇지 않습니다. 최근 러시아 외교부 대변인이 하는 말을 들어 보면, 어딘지 모르게 북한의 전투적인 아나운서가 떠오를 정도입니다.

🗣️ 러시아의 폭언
지난달 윤석열 대통령이 정부 회의에서 북한의 핵 무력 정책을 비판한 바 있는데요. 예기치도 않게 러시아가 극렬하게 반응했습니다. 윤 대통령의 발언을 두고 러시아 외교부 대변인이 “노골적으로 편향됐다(blantantly biased)”라느니 “혐오스럽게(odious)” 보인다느니 하는 거친 논평을 내놓은 겁니다. 한국은 비판 성명을 내고 주한 러시아 대사를 초치하는 걸로 맞받았습니다.

게오르기 지노비예프 주한 러시아 대사, 헤럴드 경제


💔 냉랭한 양국
북한의 김여정이 공식 석상에서 폭언을 일삼는 데 익숙할지 모르겠지만, 일국의 당국자가 상대국 지도자의 발언을 두고 공개적으로 왈가왈부하는 건 보기 드문 결례입니다. 러시아 외교부가 어쩌다 실수를 저질렀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우발적인 사건이라기보다는 한·러 관계가 이만큼이나 파탄에 이르렀다는 장면으로 읽어야겠죠.

🇺🇦 러시아의 역린
실제로 러시아의 까칠한 반응은 이번 한 번이 아니었습니다. 특히나 우크라이나 건을 두고 거북한 언사가 오간 일이 잦았는데요. 혹여 한국이 우크라이나에 무기를 지원할까 싶어, 러시아는 사소한 말 한마디에도 과민하게 반응하는 모양새입니다.

당장 지난달 말에도 러시아 외교부는 “서울[한국]의 충동적 행보가 양국 관계를 완전히 붕괴시킬 수 있다”라고 경고했습니다. 얼마 전 신원식 국방부 장관이 의 인터뷰에서 우크라이나에 군사적 지원을 해야 한다는 견해를 밝혔는데요. 개인적인 의견일 뿐 무기를 지원하지 않는 정부 방침을 지지한다고 밝혔음에도, 러시아는 즉각 반응했습니다.

코리아헤럴드


올해 상반기에도 비슷한 잡음이 있었습니다. 윤 대통령이 와의 인터뷰에서 우크라이나 전쟁이 파국으로 접어들 시 군사적 지원을 고려하겠다고 답하자, 러시아는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국가안전보장회의 부의장이 직접 나서서 한국이 개입하면 대가를 치를 거라고 을러멨습니다.

로이터 통신


과거: 동반자가 되기를 기대한 양국
한국과 러시아가 항상 이렇게 으르렁댔던 건 아닙니다. 2000년대와 2010년대까지만 해도 양국 간에는 훈훈한 분위기가 감돌았는데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과거 양국은 전략적 동반자 관계를 선언했을 만큼 서로를 향한 기대가 컸습니다.

👥 애매모호한 관계
20세기 이래로 한국과 러시아의 관계가 그리 긴밀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미국, 중국, 일본, 베트남, 대만 등의 국가에 비하면 양국의 교역 규모가 크지도 않았고, 국제 정치적인 사안에서도 한국과 러시아는 입장을 함께하거나 행보를 같이 걸을 만큼 가깝지 않았습니다. 

👀 서로의 기대
하지만 양국 관계가 꾸준한 발전을 이뤄왔고, 동시에 더 발전할 여지가 있었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양국엔 서로의 협력과 도움을 받아야 할 필요가 있었고, 그 필요를 충족하기 위해 보다 적극적으로 가까이 다가갈 의향도 있었습니다.

💰 북방과 동방
한국과 러시아는 한반도에서 연해주, 시베리아로 이어지는 광활한 지역을 기회의 땅으로 눈여겨봤습니다. 지금으로선 경제적으로 미미한 지역이나, 본격적으로 개발에 나서고 경제 협력을 추진한다면 경제적 실익을 얻을 수 있겠다는 계산이 있었죠. 그 계산 위에서 한국의 신(新)북방정책(또는 新실크로드, 유라시아 이니셔티브)과 러시아의 신(新)동방정책이 접점을 만들었습니다. 

🇰🇵 대북 문제
북핵 문제와 한반도 평화와 관련해서도 양국이 힘을 모을 지점이 있었습니다. 방법론에서는 시각이 다를지 몰라도, 북한의 핵 개발을 저지하고 한반도를 비핵화한다는 원칙에서만큼은 입장을 함께했기 때문입니다.

한국은 러시아가 남북의 가교 역할을 수행할 수 있으리라고 봤습니다. 러시아는 중국만큼은 아니지만 나름 북한에 영향력이 있는 국가입니다. 그런 러시아의 협조를 받을 수 있다면 대북 외교를 추진하고 나아가서는 평화 체제를 수립할 수 있겠다는 기대가 있었습니다.

러시아는 국제적인 위상과 영향력을 입증하기 위해서라도 동북아의 핵심 현안인 한반도 문제에 발을 걸쳐야 했습니다. 목표는 한반도 문제에서 국제적인 리더십을 보여주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북한뿐 아니라 남한과도 균형 잡힌 관계를 맺어야 했습니다. 즉, 러시아로서도 대북 문제에서 남한과 공조할 유인이 있었습니다.

2008년 양자 회담을 가진 한국의 이명박 대통령과 러시아의 드미트리 아나톨리예비치 메드베데프 대통령, 연합뉴스


🤝 전략적 동반자
시기에 따라 정체와 후퇴가 있기도 했지만, 상호 간의 필요가 추동한 양국 관계는 발전의 흐름 위에 있었습니다. 2008년에는 양국 정상이 한·러 관계를 전략적 동반자로 격상하기까지 했습니다. 사안마다 일회적이고 부분적으로 협력하는 게 아니라, 전방위적으로 상시적인 협력을 구축하자는 약속이었는데요. 이후로도 박근혜 대통령, 문재인 대통령 모두 임기 중 두 번은 러시아를 방문했을 정도로 협력에 공을 들였습니다.



현재: 적의 친구는 적?
과거도 양국이 입장을 달리하는 껄끄러운 문제가 없던 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서로 윈윈(win-win)할 수 있는 영역이 좁지는 않았기에, 양국은 껄끄러운 문제를 덮어두고 협력할 수 있는 영역을 강조할 수 있었는데요. 지금은 상황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한반도, 동북아시아를 넘어서 글로벌한 국제 구도 자체가 한·러 관계를 갈라놓는 요인으로 작용하는 상황입니다.

🇺🇸 미국과의 삼각관계
전문가들은 한·러 관계가 미·러 관계에 종속됐다고 분석합니다. 미국이 러시아와 잘 지낼 때는 한국도 러시아와 친해질 수 있지만, 미국과 러시아가 다투면 한국도 러시아와 데면데면해질 수밖에 없다는 의미인데요. 2022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해 미국과 대리전을 치르는 한, 한국과 러시아의 관계는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 새우가 된 한국
우크라이나 전쟁 가운데서 한국은 대러 관계의 균형을 잡기가 쉽지 않습니다. 미국과 서방 국가는 한국에 러시아를 고립시키는 에 동참하라 재촉하고, 반대편 러시아는 그러기라도 하면 보복할 거라며 종주먹을 들이미는데요

우크라이나에 공개적으로는 무기를 지원하지 않되 미국을 경유해 뒷구멍으로 포탄을 우회 공급하는 것, 국제 사회에서 공세적으로 우크라이나 건을 논하지는 않되 러시아를 대상으로 한 수출 통제에는 참여하는 것. 이 정도가 한국이 어렵사리 결정한 균형점인데요.

러시아는 한국이 택한 균형점마저도 용납할 수 없는 눈치입니다. 그러니 이례적으로 무례한 논평을 내면서까지 거듭 경고의 메시지를 발신하는 거죠.

🇰🇵 북한과 삼각관계
러시아가 한국을 협박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은 북한에 있습니다. 한국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한국의 적인 북한을 돕겠다는 공갈인데요. 최근 러시아가 북한을 가까이하는 데는 여러 이유가 있지만, 그중엔 분명 한국과 미국의 손발을 묶기 위한 의도가 있습니다. 

북·러 정상회담
작년 9월 대대적으로 열린 북한과 러시아의 정상회담만 봐도 그렇습니다. 당시 양국이 재래식 무기와 군사 기술을 주고받은 건 사실인데요. 오직 그 거래만을 위해서 정상회담을 열었다고는 보기 어렵습니다. 물밑에서 교환하면 될 걸 굳이 국제적으로 홍보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죠. 혹여 수틀리면 북한을 적극 지원할 수 있다는 협박의 메시지가 함께 담겨 있다고 보는 게 적절합니다.  

당분간은 한국과 러시아의 냉랭한 관계가 해소되기를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러시아는 한국이 미국과 밀착하는 걸 눈엣가시처럼 여길 테고, 한국은 러시아가 북한 근처에서 얼쩡거리는 걸 위협으로 받아들일 테니까요.



바로 이 지점에서 러시아 푸틴 대통령의 북한 방문 가능성을 주의 깊게 지켜봐야겠습니다. 작년 푸틴 대통령의 김정은의 초청을 수락하긴 했으나 현재로선 구체적인 계획이 발표되지 않았는데요. 적어도 올해 3월 이전에는 방북이 없으리라는 소극적인 답변만 나온 상황. 방북 여부에 따라 한·러 관계는 물론이고 동북아 정세가 일대 파란을 겪을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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