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작년부터 건설업계에서 시작된 균열이 국가 경제 전체의 위기로 번질 수 있다는 무서운 소문이 돌기 시작했습니다. 부동산 시장은 싸늘하게 가라앉는 한편, 금리는 천정부지로 급등하면서 공포감이 점점 더 짙어졌습니다. 한국 경제는 살얼음판을 걷는 듯한 기분으로 한 해를 보냈습니다. 그런데 결국 위기가 터졌습니다. 중견 건설사 태영건설이 워크아웃을 신청한 건데요.
부동산 PF, 왜 문제 됐을까?
1️⃣ 부동산 시장 한파
최근 몇 년 동안 부동산 경기는 급격히 얼어붙었습니다. 주택 가격은 하락하고 거래량은 크게 줄어들었습니다. 특히 미분양 주택이 증가하고 있는데, 지난 1월 기준으로 약 75,000가구에 달했습니다. 근 10년 동안 이만큼의 미분양 물량이 쌓인 적이 없었습니다.
집을 지어도 팔리지를 않으니 건설업 전반이 위축됐습니다. 2022년 4분기엔 건설공사 계약액 총량이 전년 동기 대비 20% 가까이 줄어든 걸로 나타났습니다. 아파트나 상가를 짓는 건축 분야만 살펴보면 계약액이 무려 24.8%나 감소했죠. 건설업계의 일감이 떨어지고 있다는 뜻이죠.
2️⃣ 발 동동 구르는 건설업계
주택이 팔리지 않고, 건설 계약도 급감하면서 건설업계의 수익이 나빠지고 있습니다. 그 결과로 폐업하는 건설사의 수가 급증하고 있습니다. 올 상반기에만 폐업하는 건설사의 수가 지난 3년간의 연평균 폐업 수에 육박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아직 문을 닫지 않았지만 생사의 갈림길에 선 건설기업도 많습니다. 영업이익만으로 이자를 감당하지 못하는 회사, 즉 수익과 부채 모두가 심각한 상태인 회사를 한계기업이라고 부르는데, 지방의 중소 건설기업 중 무려 16.7%가 한계기업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수도권보다는 지방, 대기업보다는 중소기업의 상황이 더욱 나쁜 건 사실이지만, 정도가 다를 뿐 건설업계 전반이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작년 3분기 기준으로 상장 건설기업의 자본 대비 부채 비율이 107%를 넘어섰습니다. 2021년 기준 부채비율 97.8%와 비교하면 10% 가까이 오른 셈입니다.
3️⃣ 건설사에 돈 빌려준 제2금융권
문제는 건설업계의 위험성이 그 업계 내에만 한정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건설 사업에는 엄청난 투자금이 필요하며, 이를 건설기업이 혼자 감당하기 어렵기 때문에 대부분 금융권에서 자금을 조달합니다. 특히 부동산 사업의 예상 수익을 근거로 자금을 빌리는 부동산 프로젝트 파이낸스(PF) 방식이 인기를 끌었습니다.
부동산 시장이 호황일 때만 해도 부동산 PF에 돈을 빌려주는 건 위험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건설한 부동산이 팔리지 않을 리 없고, 팔리기만 한다면 큰 수익이 날 테니까요. 대출 상환은 확실하고 수익은 많은 부동산 PF에 제2금융권의 많은 금융회사들이 뛰어들었습니다.
그렇게 제2금융권에서 빌려준 대출금 중에서 회수가 힘들 수도 있는 금액(익스포져, 위험노출액)이 115조 원에 이릅니다. 카드사 등 여신 전문금융사의 익스포져는 5년 만에 4배로 증가하였고, 저축은행의 익스포져도 2배 이상 늘었습니다. 사상 최대치에 달하는 액수죠.
건설사가 하나둘 망하기 시작하면 빌린 대출금을 갚지 못하게 되고, 결국 제2금융권도 함께 위험에 노출될 수 있습니다. 이미 부동산 PF 대출의 연체율이 2배 가까이 늘어나는 등의 조짐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4️⃣ 금융 시스템 차원의 위기로 번질지도 모르는데
현재 금융 시스템 전체가 불안정한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우리나라만 아니라 해외 주요 국가들의 기준금리가 계속 상승하면서 시장의 돈줄이 마르고 있는데요. 작년에는 미국과 유럽에서 은행이 연이어 파산하는 사태까지 발생했습니다. 이런 불안한 상황에서 부동산 PF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과 같습니다.
😒 부동산 PF “응, 터질게”
지난 12월 28일 태영건설의 워크아웃을 신청하면서 결국 위기가 터졌다는 반응입니다. 다른 곳도 아니라 태영건설이라는 게 중요합니다. 태영건설은 국내 수많은 건설사 중에서도 시공 능력으로 20위 내에 드는 중견 기업인 데다, 코스피에 상장됐을 만큼 규모 있는 건설사인데요. 이런 태영건설이 빚을 못 갚겠다고 백기를 든 건 충격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2020년대 들어서 ‘부동산 PF가 위험하다’ ‘언제 터질지 모른다’ 하는 경고가 빗발쳤습니다. 그 조마조마하던 부동산 PF가 마침내 터져버렸고, 결국은 중견 건설사를 자빠뜨렸죠.
원칙적으로 부동산 PF는 사업을 추진하는 시행사가 받는 대출입니다. 하지만 금융사들은 사업성만으로는 대출을 주기에 불안해서 일반적으로는 시공을 하는 건설사의 보증을 요구합니다. 달리 말하면, 부동산 사업이 안 좋아져 시행사가 대출을 갚지 못할 때 건설사가 채무를 맡게 되는 구조입니다. 태영건설도 그렇게 PF 채무에 보증을 섰는데요. 당장 지난달에 성수동 오피스텔 사업에서 480억 원의 보증 채무의 만기가 돌아왔고, 앞으로 1년 동안 3조 원 이상의 채무 만기가 돌아올 예정이었습니다. 태영건설은 이 채무를 모두 갚을 수 없다고 판단하고 워크아웃을 신청한 겁니다.
🤦♂️ 살아난다, 못 살아난다, 살아난다.
태영건설이 완전히 무너진 것은 아닙니다. 지금은 워크아웃을 신청한 단계죠. 워크아웃은 법적으로 '채권단 공동관리'라고도 하며, 일반적으로는 '기업 개선 작업'이라고 불립니다. 당장 빚을 갚을 수는 없지만, 그래도 가망이 있는 기업에 회생의 기회를 주는 제도입니다. 워크아웃 시 빚을 받아야 하는 채권단은 상환 기간을 미루거나 이자와 채무를 감면하는 등의 방식으로 채무 기업이 숨을 돌릴 시간을 마련해줍니다.
태영건설이 워크아웃을 신청하긴 했지만, 신청을 받을지 말지는 채권단의 결정입니다. 채권단의 75% 이상이 동의해야만 워크아웃 절차에 착수할 수 있습니다. 채권단은 워크아웃으로 채무 기업의 손해와 위험을 함께 지게 되는 만큼, 태영건설로선 채권단을 설득하기 위해 합리적인 계획과 확고한 의지를 보여야 합니다. 어떻게든 회사를 살려서 빚을 갚겠다는 확신을 줄 수 있어야 하죠.
하지만 태영건설이 내놓은 자구책에 대해 불충분하다는 비판을 넘어 회생 의지가 없다는 지적까지 나옵니다. 부동산 시장이 침체하면서 위기가 발생한 것은 사실이지만, 안일하게 기업을 운영한 경영자 역시 이번 사태의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채권단은 태영건설 소유주 일가가 개인 자금 약 3천억 원을 내놓을 것으로 기대했었죠. 하지만 태영건설이 내놓은 자구책을 보니 사재 출연 내용은 없었습니다.
또한, 채권단은 태영건설이 주요 계열사인 SBS의 지분을 매각하길 기대했지만, 태영건설의 대주주는 가능한 한 SBS를 손에서 놓지 않으려는 태도를 보이면서 채권단의 반응은 싸늘했습니다. 결국 입장이 좁혀지지 않으면 채권단이 신청을 거절하고 결국 태영건설이 법정관리에 들어갈지도 모릅니다.
법정관리에 들어가면, 법원의 주도하에 모든 채무가 동결되고 기존 계약도 자동 해지됩니다. 채무 삭감은 기대할 수 없고 사실상 정상적인 기업 활동이 전면 중단되는 겁니다. 이에 금융 당국도 태영건설을 작심 비판했는데요. 이에 금융 당국도 태영건설을 강하게 비판하고, 1월 7일까지 채권단을 설득할 만한 대안을 제시하라고 경고했죠.
🤷♀️ 건설업계 “야 너두…?”
하지만 정부는 태영건설이 무너지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큰 기업이 무너지면 파급효과가 어마어마하기 때문입니다. 당장 태영건설이 보증한 채무 규모만 해도 9조 원 이상인데, 이대로 태영건설이 무너지면 대출을 내준 금융권이 흔들리고, 대출을 받은 사업장, 연관된 협력 업체도 큰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다행히 태영건설의 위기가 건설업계 전체나 금융 위기로 번질 가능성은 적다는 분석이 많습니다. 당연히 태영건설과 직접적으로 연결된 부분에서는 파장이 일어날 수 있지만, 이번 사건만으로 건설업계가 한꺼번에 주저앉는다거나 금융위기가 터지지는 않으리라는 건데요. 금융당국도 상황의 심각성을 인지해 자금을 공급하는 등 적극적으로 대처하고 있습니다. 태영건설 위기가 시스템 전체를 크게 흔들 가능성은 작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태영건설 사건이 무서운 건, 이게 하나의 신호일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태영건설이 무리해서 부동산 PF를 일으키고 보증을 선 건 사실이지만, 이만큼이나 규모 있는 건설사가 무너졌다는 건 다른 건설사도 언제든 비슷한 위기에 처할 수 있다는 뜻이나 다름없습니다.
이미 부동산 PF의 연체율이 위험 수준까지 증가하고, 작년 대비 폐업하는 중소 건설사의 수도 크게 늘었습니다. 내년에도 고금리와 경기 침체가 계속된다면 제2의 태영건설 사태, 나아가 건설사들의 줄도산 가능성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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