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편도 중국 편도 아닌 제3진영 글로벌사우스

💡 3줄 요약

 

중국, 러시아의 동맹이 아니면서도 서방국과 거리를 두는 제3진영 글로벌 사우스가 부상하는 추세입니다.

 

글로벌 사우스는 우크라이나 전쟁을 둘러싼 국제 무대에서 독자적인 영향력을 스스로 증명했는데요.

 

글로벌 사우스는 미·중 패권 경쟁과 진영 갈등에서 중립을 자처하며 국익과 실리를 추구할 걸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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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의 국제 정세는 어떻게 돌아가던가요? 큼직한 에피소드만 골라 말해보자면. 미국이 독주하는 단극 패권이 막을 내리고 미국과 중국의 패권 경쟁이 치열하게 전개된다는 이야기, 지정학적으로는 서방 세계와 중국, 러시아, 이란, 북한이 유럽과 중동, 아시아에서 맞부딪친다는 이야기, 지경학적으로는 지난 수십 년간 세계화된 국제 경제가 다시금 블록으로 쪼개지는 형국이라는 이야기가 나오는데요.

 

하나하나 국제 정세를 논하는 데 빼놓을 수 없지만, 이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습니다. 지금의 세계는 미국과 중국의 다툼만으로 설명할 수 없고, 서방과 동방의 정치적·경제적 대립만으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요즘은 미국과 중국만큼이나 인도가 중요한 국가로 이야기되고, 서방과 동방의 갈등이 치열한 만큼이나 스스로 독자적인 길을 모색하는 남방의 행보가 눈에 띄니까 말이죠. 인도와 인도네시아, 사우디아라비아, 멕시코, 칠레, 브라질, 이집트, 남아프리카공화국 등등. 오늘은 국제 무대에서 점차 무게감 있는 주인공으로 떠오르는 글로벌 사우스(Global South)를 소개해 보려고 합니다.

신흥국·개발도상국 중심으로 구성된 글로벌 사우스의 영향력이 점점 확대되며 인도에서 열린 G20 정상회의 합의문 작성 과정에서도 이들의 영향력이 발휘됐다. 사진=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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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사우스라는 깃발

글로벌 사우스라는 이름이 낯설다면 글로벌 웨스트(West), 즉 서방이라는 이름을 떠올려 봅시다. 서방 세계는 보통 일본이 포함되므로 단순히 지구 서편에 위치한 나라를 부르는 이름도 아니고, 산유국은 서방이 아니므로 부유한 국가를 총칭하는 이름도 아닙니다. 서방은 유사한 이해관계를 바탕으로 국제 무대에서 입장을 함께하는 하나의 느슨한 세력권을 일컫는데요. 글로벌 사우스도 마찬가지입니다.

 

🗺 남녘의 나라들?

글로벌 사우스를 직역하자면 ‘지구의 남부’ 쯤이 될 텐데요. 이름과 달리 단순히 지리적인 개념만은 아닙니다. 글로벌 사우스로 분류되는 국가가 대개 남반구나 북반구 저위도에 위치하는 건 사실이지만, 굵직한 예외가 여럿 있습니다.

 

글로벌 사우스의 대표 격으로 이야기되는 인도만 해도 위도로 따지면 미국과 큰 차이가 없습니다. 더구나 남반구 복판에 위치한 호주나 뉴질랜드는 외려 글로벌 사우스에 포함되지 않습니다.

 

💵 개발도상국?

글로벌 사우스는 지리보다도 경제력이 중요한 기준일 수 있습니다. 글로벌 사우스의 대다수는 저소득 국가 또는 중소득 국가고, 1인당 국민총소득(GNI) 1만 3천 달러 이상의 고소득 국가 가운데 글로벌 사우스로 분류되는 국가는 드뭅니다. 익숙한 용어로 말하자면 글로벌 사우스는 개발도상국과 신흥경제국(emerging markets)을 묶어 부르는 말로 이해할 수 있죠.

💬 정치적 슬로건

그러면 자연스레 질문이 떠오릅니다. 왜 개발도상국이라는 익숙한 개념을 두고 글로벌 사우스를 이야기하는 걸까요? 그리고 왜 하필 지금 그 애매한 개념이 전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을까요?

 

저명한 정치학자 조지프 나이(Joseph S. Nye, Jr.)에 따르면, 글로벌 사우스는 정치적인 슬로건입니다. 개발도상국이나 남반구가 경제적, 지리적 공통점을 포착한 객관적 분류라면, 글로벌 사우스는 그에 더해 정치적인 함의를 내포합니다.

 

🇺🇳 G-77

보통 글로벌 사우스는 개발도상국의 모임인 G-77(Group of 77)과 동일시되곤 하는데요. G-77이 천명한 목표를 읽어 보면 글로벌 사우스의 정치적 성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겁니다.

 

 

“77그룹은 유엔에서 가장 큰 개발도상국 정부 간 기구로, 글로벌 사우스 국가의 집합적인 경제적 이익을 표명, 증진하고, 유엔 체제 내 모든 주요 국제 경제 사안에서 공동의 협상 능력을 강화하며, 개발을 위해 남남 협력을 촉진하기를 목표한다."
 
"The Group of 77 is the largest intergovernmental organization of developing countries in the United Nations, which provides the means for the countries of the South to articulate and promote their collective economic interests and enhance their joint negotiating capacity on all major international economic issues within the United Nations system, and promote South-South cooperation for development.”
 

 

여기서 글로벌 사우스는 국제 무대에서 함께 목소리 내고, 함께 협상하며, 함께 협력하기로 결의한 하나의 세력입니다. 단순히 개발도상국을 묶어 부르는 이름이 아니라, 국제 정치적으로 편을 가르는 외교적인 분할선이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 G-77: 1964년 유엔에서 개발도상국 77개국이 결성한 모임입니다. 회원국의 수를 따서 G-77이라 이름했는데요. 이후 회원국이 늘어 지금은 134개국에 이릅니다. 미국, 유럽, 호주, 캐나다, 일본, 한국과 같은 서방 선진국이나 중국, 러시아 같은 강대국을 제하면 전 세계 대부분의 국가를 포괄하는 모임입니다.

 

📆 바로 지금, 글로벌 사우스

그렇기에 최근 글로벌 사우스가 부쩍 자주 이야기되는 건, 국제 무대에서 또 하나의 세력이 존재감을 드러냈다는 뜻과 같습니다. 과거 개발도상국이라 하면 선진국이 하자는 대로 끌려가는 조연, 서구와 동구의 싸움에 휘말린 엑스트라에 지나지 않았는데요. 2020년대의 국제 질서에선 글로벌 사우스가 새로운 주연으로 떠올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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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사우스의 기권: 거부의 권력

글로벌 사우스가 본격적으로 존재감을 떨친 건 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한 이후였습니다. 한편에서는 서방 세계가 러시아를 고립시키려 애쓰고, 다른 한편에서는 러시아가 항변하고 중국, 북한, 이란이 그를 노골적으로 편드는 대립 구도가 드러났는데요. 그 가운데 러시아의 동맹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서방의 의견을 따르지도 않는 또 하나의 세력이 있었으니, 그게 바로 글로벌 사우스였습니다.

🗣 뉴욕의 외교전

전쟁은 우크라이나에서 벌어졌지만, 동시에 뉴욕의 유엔 본부에서도 치열한 외교전이 펼쳐졌습니다. 유럽과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방국은 러시아의 침공을 규탄하고 배상을 요구하거나 우크라이나에 대한 인도주의적 지원을 촉구하는 등 외교적 압박을 시도해 왔는데요. 유엔 총회에서 서방국이 주도한 결의안 대부분이 가결되긴 했으나, 그 투표 결과는 서방국의 일방적인 승리와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  사우스의 기권

예컨대 ‘러시아의 유엔 인권이사회 이사국 지위 박탈’에 관한 결의안은 2022년 4월 회원국 193개국 가운데서 175개국이 투표하고 93개국의 찬성, 24개국의 반대로 가결됐습니다. 중국, 이란 등 러시아와 가까운 국가가 반대한 건 이상할 게 없으나, 무려 58표에 이르는 기권이 나온 결과는 결코 심상치 않은데요. 러시아를 겨냥한 여타 결의안에서도 30표 이상의 기권이 꾸준히 나왔고, 그 대부분은 글로벌 사우스의 것이었습니다.

🔍 글로벌 사우스의 거부

가까운 예를 찾자면, 지난 15일부터 16일 스위스에서 열린 우크라이나 평화 정상회의를 이야기해 볼 수 있는데요. 회의 결과 우크라이나의 영토를 보전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은 공동성명이 마련됐으나, 브라질, 인도, 남아프리카공화국, 아랍에미리트, 사우디아라비아, 인도네시아 등 글로벌 사우스에 속한 10개국이 서명을 거부했습니다.

 

👣 독자적인 행보

대량의 기권은 국제 사회에서 서방도 동방도 아닌 또 하나의 주요한 세력, 즉 글로벌 사우스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증명했습니다. 글로벌 사우스는 중국이나 러시아, 이란처럼 서방 세계와 부딪칠 생각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서방의 리드를 순순히 따라줄 생각도 없습니다. 서방이 러시아에 이를 갈든 말든, 글로벌 사우스는 러시아와의 관계에서 국익을 확보할 수 있다면 주저 없이 손을 내밀 만큼 현실주의적입니다.

 

🚧 제재 무력화

실제로 글로벌 사우스는 서방의 러시아 제재에 동참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튀르키예, 아랍에미리트, 인도 같은 나라는 러시아와 교역을 늘리기까지 했는데요. 제재라 함은 숨구멍 없이 조여야 효과를 보기 마련인데, 글로벌 사우스가 공공연히 러시아의 숨통을 틔웠으니 서방의 제재는 효과를 볼 수가 없었습니다. 글로벌 사우스가 이른바 거부의 권력(power of denial)을 행사해 국제 질서를 좌지우지할 만큼의 힘을 갖췄다는 사실이 드러났죠.

 

🤦 난감한 서방

만약 글로벌 사우스가 변변찮은 나라들이었다면, 서방국은 러시아와 교역하는 국가, 기업, 은행을 함께 제재하는 2차 제재(secondary boycott)로 글로벌 사우스를 협박했을 겁니다. 실제로 미국은 러시아산 원유를 사들이는 인도를 비롯한 글로벌 사우스를 향해 수차례 경고하기도 했는데요. 경고에 그쳤을 뿐 실제로 강수를 두지는 못했습니다. 지난 6월에야 튀르키예, 아랍에미리트 국적의 개인과 단체에 2차 제재를 부과한 게 전부입니다.

 

👄 인정받은 사우스

서방국이 섣불리 글로벌 사우스를 윽박지르지 못하는 건, 현재 국제 정세에서 글로벌 사우스가 무시할 수 없는 지위에 있다는 걸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작년 인도가 의장국을 맡은 G20 정상회의의 공동선언에서 러시아를 강력히 규탄하는 내용이 제외된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서방국으로선 그런 미적지근한 공동선언에 합의할 수 없었겠으나, 의장국인 인도와 여러 글로벌 사우스 정상의 입장을 존중할 수밖에 없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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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거리 외교: 웨스트와 이스트 사이에서

중국, 러시아, 이란, 북한 등 이른바 글로벌 이스트(Global East)는 서방국의 압박을 벗기 위해 글로벌 사우스의 협력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마찬가지로 미국과 유럽 등 글로벌 웨스트(Global West)는 중국과 러시아를 고립시키고 자유주의적인 국제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글로벌 사우스의 협조를 구해야 할 처지죠. 이렇듯 양쪽에서 러브콜을 받는 글로벌 사우스는 등거리 외교를 펼치며 실리와 국익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 과거의 비동맹

냉전이 한창이었던 20세기에도 서구권과 동구권이 아닌 제3의 세력이 존재했습니다. 제3세계(The Third World)에 속하는 나라들이 비동맹 운동(Non-Aligned Movemnet)을 선언하고 독자적인 길을 걷고자 했는데요. 냉전의 양극적 구도를 타파하겠다고 나서긴 했으나, 양극의 구심력을 이겨내기엔 비동맹 국가의 무게가 지나치게 가벼웠습니다. 결국 냉전의 국제 무대에서 이렇다 할 역할을 하지 못하고 들러리로 전락하고 말았죠.

 

💪 글로벌 사우스의 차이

하지만 21세기는 상황이 다릅니다. 20세기의 비동맹 국가에 비해 21세기 글로벌 사우스의 힘이 월등히 강력해졌기 때문입니다.

 

냉전기 비동맹 국가는 전 세계 인구에서 46%를 차지하는 데 그쳤는데요. 현재 글로벌 사우스의 인구는 세계 인구의 60%를 웃돌고, 인구 상위 20개국 중 15개국이 글로벌 사우스입니다. 특히 젊은 인구가 많아 인구 구조가 국가 성장에 유리합니다.

 

글로벌 사우스는 경제적으로도 잠재력이 뛰어납니다. 글로벌 사우스의 여러 국가가 첨단 산업 공급망에서 핵심적인 지하자원을 상당량 보유한 데다, 세계 교역에서 점점 중요한 지위로 떠오르는 추세입니다. 대한상공회의소가 IMF 자료를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향후 글로벌 사우스의 GDP 성장률은 연평균 6.3%로, 3.9%의 선진국보다 빠르게 성장할 걸로 보입니다.

 

😘 강대국의 구애

한마디로 글로벌 사우스는 이미 중요하고, 앞으로는 더욱 중요해질 유망주입니다. 여러 강대국이 글로벌 사우스를 포섭하기 위해 손을 내미는 건 당연한 일인데요.

 

중국은 글로벌 사우스의 맏형을 자처하며 적극적으로 협력을 꾀합니다. 일대일로 정책을 펼치며 여러 개발도상국에 막대한 인프라 투자를 쏟는가 하면, 신흥경제국의 모임인 BRICS(브라질, 러시아, 인도, 중국,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문을 열어 회원국과 관계를 확장하고 있습니다.

 

미국도 중국에 발맞춰 경쟁을 이어가는 모습인데요. 2022년엔 G7을 중심으로 글로벌 인프라·투자 파트너십(PGII)를 발족해 개발도상국을 대상으로 대규모 투자를 추진했고, 작년 G20 정상회의에선 인도-중동-유럽 경제회랑(IMEC) 양해각서를 체결해 중국의 일대일로를 견제할 구상을 제시했습니다.

⚖ 현실주의적인 균형

열렬한 구애를 받는 글로벌 사우스지만, 미국이냐 중국이냐, 서방이냐 동방이냐의 양자택일은 최대한 미루는 모습입니다. 지정학적 중립 지대에서 국익을 극대화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인데요.

 

세계 시장이 미국과 중국의 양대 블록으로 쪼개지는 상황에서, 글로벌 사우스는 두 블록을 잇는 역할을 자처해 투자와 교역을 끌어모을 수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인도는 서구의 눈총을 받으면서도 러시아와 교역을 하고, 동시에 미국과는 안보 협력을 약속하며 대규모 산업 투자를 유치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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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각에서는 글로벌 사우스를 묶어 부르기엔 그 내부가 불안정하고 유동적이라는 점을 지적하기도 합니다. 개발도상국이라는 공통점에 주목하기엔, 개발도상국마다 여건이 상이하고 지향이 다르다는 이야기인데요.

인구 2억 명을 웃도는 브라질과 인구 100만 명이 채 되지 않는 남태평양의 작은 섬나라 피지 공화국의 이해관계가 얼마나 비슷할지를 곰곰이 생각해 보면, 고개를 끄덕일 만한 지적입니다.

 

결국 글로벌 사우스의 미래는 글로벌 사우스의 손에 쥐어졌다고 말할 수밖에 없겠습니다. 국제 사회의 불평등한 구조에 항의하는 크고 작은 신음을 한 목소리로 갈무리할 상상력에 따라, 그 상상을 현실로 실현할 외교적 역량에 따라, 글로벌 사우스가 실체 없는 허상일지, 아니면 진정 국제 무대의 주연으로 떠오를지가 정해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