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과대학 입학 정원을 두고 시작된 정부와 의사들 사이 갈등이 길어지고 있습니다. 정부는 ‘꼭 필요한 분야나 지역에 의사가 부족하다’며 정원을 늘리고 싶어 하고, 의사들은 ‘의사만 늘려선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며 강하게 반발하고 있죠.
상황은 점점 심각해지고 있는데요. 전공의 1만 2225명이 수련하는 주요 병원 100개를 기준으로, 지난 6일 오전 11시까지 병원을 떠난 전공의는 1만 1219명(91.8%)에 달합니다. 사실상 대부분이 사직서를 제출하거나 계약을 포기하겠다고 밝힌 뒤 출근하지 않은 겁니다.
당연히 병원에선 혼란이 벌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의사 부족으로 수술 일정이 취소되거나 연기되고, 응급실 운영도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정부는 보건의료 분야의 재난 위기 경보를 최고단계인 ‘심각’으로 높이고, 장기화하는 갈등에 대비하기 위한 조치들을 내놓고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는 정부와 의사 간 견해차를 다뤄 봤는데요. 오늘은 양측의 주장보다는 정부의 대응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특히 앞으로 우리나라 의료 체계에 영향을 줄 수 있을 만한 조치들이 있어서, 알아두셔도 좋습니다.
장기전에 대비하는 정부
정부는 우선 전공의들이 병원으로 돌아가도록 압박하는 법적 조치에 착수했습니다. 업무개시명령을 내리고, 복귀하지 않은 의사들에겐 법에 따라 3개월 이상 면허정지 처분을 하겠다고 경고했죠.
🔎 특정 직군 종사자들의 휴업·파업 등이 국가 경제나 국민 생활에 심각한 위기를 초래할 수 있다고 판단될 때 정부가 업무에 복귀하도록 내리는 명령입니다.
하지만 실제로 복귀하는 의사들은 많지 않은 분위기입니다. 정부는 ‘비상 진료체계’를 구축하겠다고 선언한 뒤 장기전에 대비한 여러 조치들을 총동원하기 시작했는데요. 전공의 이탈로 의사가 부족해진 병원에 당장 정부가 움직일 수 있는 공중보건의와 군의관을 파견하고, 전보다 더 일하는 기존 인력에게 지급할 인건비도 지원하기로 했습니다.
🔎 의사 자격을 가진 입영 대상자가 지역 보건소·병원 등 공중 보건 업무에 종사하며 군 복무를 대체하는 제도입니다.
의료 위기에 총동원되는 수단
이번 의료 위기에 대응하는 정부의 카드 중 가장 주목받고 있는 건, 약 10개월 전 의료계에서 논란이 됐던 것들이에요. 바로 ‘PA 간호사’와 ‘비대면 진료’인데, 아이러니하게도 당시엔 정부가 의사들의 반대 의견을 받아들여 활용하지 않았던 수단들입니다.
PA 간호사가 뭐야?
정부는 전공의들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지난달 27일부터 ‘PA 간호사’들이 일부 진료 행위를 보조하도록 허용하는 시범사업에 착수했습니다. PA 간호사(Physician Assistant)는 보통 우리나라에선 ‘수술실 간호사’나 ‘임상 전담간호사’, ‘진료 보조 간호사’ 등으로 불립니다. 의료 기관에서 의사가 할 업무의 일부를 대신하는 간호사들을 뜻합니다.
PA 간호사는 미국 등 일부 국가에선 정식으로 제도화됐지만, 우리나라 법에는 제대로 규정돼 있지 않습니다. 다만 2000년대 초부터 여러 병원에서 관행처럼 활용해 왔다고 합니다. 숙련된 간호사에게 일부 업무를 맡긴 건데, 전국에 이런 PA 간호사는 1만 명 이상 활동하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습니다.
PA 간호사의 업무는 사실 법을 해석하기에 따라 불법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의사가 해야 하는 진료 행위를 의사 면허 없이 한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인데요. 사실 약 10개월 전 논란이 됐던 ‘간호법’은 PA 간호사 관행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습니다. 당시 간호사들은 ‘업무 범위를 명확하게 정의하기 위해 간호법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는데요. 관행에 따라 불법과 편법을 오가며 일하는 간호사들을 보호해 달라는 주장도 담겨있었던 겁니다.
하지만 의사들은 간호법을 제정해 간호사들의 업무 범위를 넓히면, 장기적으로 의사의 의료 영역을 침범할 수 있다고 우려하며 파업까지 불사하겠다고 반발했습니다. 더불어민주당 주도로 지난해 2월 말 국회를 통과했던 간호법은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로 제정이 무산됐습니다.
양지로 나오는 PA 간호사
정부는 의사들이 병원에서 이탈하는 비상 상황을 고려해 ‘PA 간호사’ 카드를 꺼내 들었습니다. 아직 법적으로 규정된 제도가 아니다 보니, 오늘(8일)부터는 PA 간호사 관련 시범사업의 보완 지침을 시행하겠다고 추가로 발표했습니다.
정부 지침에 따르면, 병원들은 숙련도를 고려해 간호사들을 ‘전문간호사’와 ‘전담간호사(PA)’, ‘일반간호사’ 등으로 나누고 전문·전담간호사에 일부 PA 업무를 맡길 수 있게 됐는데요. 기존에는 이렇게 간호사를 숙련도에 따라 나누는 제도가 없었습니다. PA 간호사 활용을 새로 도입하기로 한 겁니다.
PA 간호사가 할 수 있는 업무 사례
입원 환자의 상태 파악
심전도·초음파·코로나19 검사
응급 상황의 심폐 소생술과 약물 투여
기관 삽관·조직 채취 (전문 간호사만 가능)
프로토콜(약속된 원칙)에 따른 약물 처방
(최종 승인은 의사가 해야 함)
진단서·전원의뢰서·수술 기록 초안 작성
(최종 승인은 의사가 해야 함)
PA 간호사가 할 수 없는 업무 사례
사망진단
대리 수술
전신마취
전문의약품 처방
사전의사결정서 작성
의사가 지시하지 않은 의료행위
정부는 총 98가지 의료 행위 중 간호사들이 할 수 있는 업무와 할 수 없는 업무를 구분했습니다. 또한, 간호사들이 추가 업무를 맡을 경우 의료기관이 보상하고, 관리·감독 부족으로 발생한 사고의 법적 책임은 의료기관장이 지도록 정했습니다. 정부는 과거와 상황이 달라진 만큼,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했던 간호법 제정 또한 다시 검토할 방침이라고 합니다.
완전히 열리는 비대면 진료
비대면 진료도 지난달 23일부터 전면 허용됐습니다. ‘오진 위험이 크다’는 의사들의 우려에 따라 제한적으로만 허용하던 태도를 확 바꾼 겁니다. 약 9개월 전부터 시작된 국내 비대면 진료 시범사업은 큰 병원이 아닌 의원급 의료기관에서 ‘재진 환자’와 ‘의료 소외 지역 주민’ 등을 진료하는 경우에만 허용해 왔는데요. 처음 병원에 가는 초진 환자나 도시 지역 국민은 이용할 수 없었죠.
정부는 의사가 부족해진 상황을 고려해 모든 병원에서 모든 국민을 대상으로 비대면 진료를 할 수 있게 했습니다. 이 조치는 의사들의 집단행동이 종료될 때까지 적용됩니다.
(물론 실제로 모든 병원에서 비대면 진료를 받기는 힘든 상황인데요. 병원에서 비대면 진료를 제공하는 건 자유이고, 아직 이 서비스에 익숙한 국민도 적습니다)
의대 정원을 두고 벌어진 이번 갈등은 어쩌면 우리나라 의료 체계를 크게 바꾸는 사건이 될 수도 있습니다. 정부의 의지대로라면 PA 간호사·비대면 진료 제도가 도입되는데요.
정부와 의사들의 갈등이 이어지는 동안, 의료 체계의 혼란을 몸소 경험하는 국민도 점점 많아지고 있습니다. 과연 이번 의료 위기는 어떤 결말을 맞게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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